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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이일화 · 석전문중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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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은 순천인(順天人)으로 호가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그가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탄로(綻露)나 그 죄에 연좌( 連坐 : 한사람의 죄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벌을 받는것)되어, 아들 박헌(朴憲)․박순(朴珣)과 동샌 박분(朴奮) 그리고 부친 박중임(朴仲林)까지 함께 모두 여덟 사람이 사형 당하였다.


    그의 아들 박순의 아내 이씨(李氏)는 대구(大邱) 관비(官婢)가 되었다.


    다행히 임신중(姙娠中)이라 아들을 낳으니 소위 유복자(遺腹子)이다.


    그 어린 아이도 조부(祖父)의 죄에 연좌되어 사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딱한 운명(運命)에 놓여 있었다. 불행중(不幸中) 다행으로 그 때의 충복(忠僕)인 여자 종이 마침 딸을 낳았는데, 그의 충절(忠節)에 감동(感動)되어 자기의 딸을 대신(代身) 사형 당하게 하고, 박순의 아들을 자기가 낳은 양 바꿔서 길러 이름까지 위장(僞裝)하여 박비(朴婢)라 불렀다.


    그 뒤 성종은 이극균(李克均)이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가 되어 「易養朴婢」한 사실을 조정에 자진 알리게 하여, 용서를 받아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이라 고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만고(萬古)의 충신 박팽년의 혈통(血統)을 다행히 이어지게 되었다.


    지극(至極)히 어려운 재난(災難)을 당하였는데도. 불행중 다행으로 가문(家門)의 혈통이 이어지는 것을「易養朴婢」로 비유한다.



    * 출처* : 한국의 역사 - 대한 고사성어

    작성자[홈:귀암]_광호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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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희공의 원래 묘소는 현 세종대왕의 영정자리었는데 예종(睿宗)이 세종대왕의 능소를 광주에서 이 곳으로 이장하게 되어 충희공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로 이장한 것이다.  

     

    현재의 영능자리는 전하는바에 의하면 문무봉군지지요 9대(九代) 將相之地(장사지지)라 하였는데 서북로는 금반형이 있어 三十대 將相之地(장상지지)로서 산천 정기를 뽑고 있는 여주 북선산 꾀꼬리봉에서 뚝 떨어진 용세가 구비쳐 가다가 다시 솟으면서 남으로 그 머리를 돌려 주봉인 꾀꼬리를 바라보며 솟아오르다가 뚝 그쳤다. 이 산줄기를 감싸준 소국은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오 대국은 회룡고조형으로 다시 조산을 돌아보는 형국이다.

     

    그 자리 위에는 병풍을 두른 듯 완만하게 개장되고 좌청룡 우백호가 겹겹히 쌓여서 꽃 닢을 두른 듯이 혈판을 감싸주고 있어서 마치 꽃봉오리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백호날이 안산을 바라보니 마치 신하가 군왕에게 조례를 드리는 듯한 군 신봉조형으로 되어 있다.

     

    이 명당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당부하기를 자손이 앞으로 헌천부귀 하더라도 묘각을 짓지 말 것이며, 앞으로 흐르는 내(川)에 다리도 놓지말라고 주의하였다. 이 산소를 모신 뒤에는 아들 오(五)형제분이 승진하셔서 장자 극배공은 영의정, 광릉부원군 차자 극감공은 형조판서 광능부원군이요, 三(삼)자 극증공은 병·이조판서를 거쳐 관중추부사 광천군이오, 四(사)자 극돈공은 좌찬성 광원군이오, 五(오)자 극균공은 좌의정 광남공이며 종반 三兄弟(삼형제)분도 극규공은 형조참의, 극기공은 공조참판_성리학 학자요, 극견공은 좌통례로서 광이 장안에 八克(팔극)조정이란 말이 퍼져있었으며, 五(오)봉군 五兄弟(오형제)가 살던 정동은 五궁 고을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성종대왕께서는 生子當廣李 滿庭追如許人[생자당광이 만정추여허인 - 아들을 낳으면 광주이가만 같은 아들을 낳아라, 조정 뜰 가득히 허공(허조 영상)과 같은 인재가 자꾸 나오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李克(이극)은 개 호걸이요, 韓忠(한충)은 진 용봉이라 했으니 당시 광이의 창성은 成俔(성현)의 慵齋叢話(용재총화)에서도 밝혔듯이 해동에서 제일 창성한 집안이었다.

     

    이와 같이 명당의 발복으로 광이 문세가 왕성하였으나 그 발복은 다 받지 못하고 이 명당은 왕기가 서렸다는 명산으로서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세종대왕의 능소는 광주 곡천(현재 형능 아래쪽 성남시로 가는 길가)에 있었으나 文宗(문종) 一年뒤에 승하하시고 또 궁중 내에서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남으로 큰 화근이라 하여 睿宗(예종)은 지관의 말을 듣고서 능소를 이장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신들은 조를 짜서 명당자리를 구하기로 하였다.

    그 때에 마침 한 일행이 여주산맥을 따라 내려오다가 골짜기로 들어서 산림속을 헤매든 중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서 비를 피하려고 살펴보니 산림속에 한 정자가 보이기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서 비석이 서 있는 묘를 발견하고서 가까이 가서보니 前朝(전조) 右相(우상) 이모(仁孫)의 묘인데 산세가 수려하고 정기가 어리어서 비단 將相之地(장상지지)가 아니라 왕기가 서리어는 대명당이었다. 돌아가서 왕을 拜謁(배알)하니 왕께서 '능소를 정할 좋은 명당자리를 구했느냐'고 하문하셨다.

     

    지관이 아뢰기를 '참으로 좋은 명당자리가 있긴 하옵니다만 ..은' 하고 말끝을 흐리었다. '그런데 어떠하다는 말이오'하고 왕은 반문하였다. 그러자 지관은 '그것은 벌써 타인이 쓴 것으로 아뢰옵니다.' 라고 하였다. '누구의 묘소인가' 하고 물으시자 '前朝(전조) 右相(우상) 이모(仁孫)의 묘인가 하옵니다.' 고 아뢰니 왕은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더운데 수고들 하였다' 하시고 어사주를 내리시고 위로한 후에 돌려 보냈다.

     

    그리고 충희공의 자제인 극배공에게 왕이 말씀하시기를 '공에게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 말하기가 어렵다'고 하시었다. '무슨 분부이신온지요'하고 아뢰이니 '위선사에는 군신이 일반인데 선대왕의 능침이 불길하다기에 지관에게 구산을 하였던 바 공의 선영자리가 명당자리라고 하나 차마말하기가 곤란하오' 라고 하시는 것이다.

     

    공은 '물러가 집안에 상의하고 아뢰겠습니다.' 하고 물러 나왔다. 그리하여 종반 八克 兄弟(팔극 형제)들과 문중 어른들이 상의할 때 광원군 극돈공과 광남군 극균공은 극구 반대하였으나 백형(伯兄)인 극배공은 천도와 지도가 따로 있으니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하여 이장키로 하고 지관을 데리고 구산을 하여 광주 선산에 모시기로 하고 일진을 가리어 충희공의 묘소를 파헤치고 관을 덜어내니 그 밑에 기름종이가 발견되었다. 한 구절의 글이 쓰여 있었는데 이는 고려국 국사인 地聖(지성) 玉龍寺(옥룡사 - 또는 법왕사) 道詵(도선)의 秘記(비기)이었다.

     

    『상공삼년 권조지지 단지대 왕 영평지지(相公三年 權操之地 短之大 王 永平之地) - 상공이 삼년임시로 장사지낸 뒤에 다리 짧은 임금님(세종)의 기리 장사할 곳』이라 쓰여 있었고, 또 비기 하나는 이 자리에 주인이 나타나면 연을 높이 올려서 연줄을 끊고서 연이 날아가서 떨어진 곳에 장사 지내라고 하였다. 이를 본 집안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기고 그대로 하였더니 연은 날아서 十里 밖에가서 떨어졌으므로 그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延注里(연주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곳이 경기도 능서면 신지리 충희공의 현 묘소 부근이다. 이 자리도 명당으로서 그 후 자손들이 十대까지만도 직계자손이 二百여명이나 등과하였다. 그때 이곳으로 세종대왕 능을 장사지내므로 전주 이씨 왕문이 二百年을 더하여서 五百十九年(519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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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에 위치한 좌통례공(이극견)의 묘소
    후손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현재 극견이 위치한 묘역은 본래 창녕성씨의 소유지였다고 한다. 이 곳은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고, 극견의 장인이 돌아가시자 이 자리에 묘를 쓰려고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안장하기 바로 전날, 극견의 부인이 밤중에 몰래 가서 광중에 물을 채워두었다고 한다. 다음날 시댁 사람들이 묘를 쓰려고 가보니 바로 그 자리에 물이 차 있었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곳을 피하여 장사 지냈다고 한다.

     

    뒤에 성씨 부인의 남편이 돌아가시자 바로 그 자리에 장례를 치르고 이로 인해서 후손들이 발전했다고 한다. 뒤에 칠곡으로 이주한 후손들이 번창한 것은 바로 성씨부인의 지혜 때문이라고 전한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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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실록』권3에 실려 있는 이지직의 상소문 ]
     
     

     

    이지직은 태종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관직생활중 청빈과 절조있는 행적으로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초선되었다.
     
    그는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재직하던 1409년(태종2) 4월 태종을 심하게 질책하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군정 및 대외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군수(軍需)를 잘 갖추어야 할 것과 군정에서 말을 소중히 할 것, 그리고 요동 등에서 망명하는 백성들에 대한 대책등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런 상소문의 서문에서 국왕으로서의 바르지 못한 행실을 공박하였으니, 그는 중국의 성군인 성탁이나 문왕은 새벽에 일어나 간하는 말을 들었고, 조심하면서 정사를 돌보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태종은 아름다운 옷을 입기를 좋아하고, 제도를 잘 따르지 않고, 대간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며, 또한 매와 개를 좋아하고 성색을 즐겨하심이 여전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소문은 조정에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특히 태종이 성색을 좋아한다는 문구는 더욱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사간원등으로 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이후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절조는 뒤에 자손들이 번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니, 그의 세아들과 일곱명의 손자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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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이씨 족보(1724년) ]

     

    둔촌할아버지가 영남지방과 맺은 인연에 대해서는 '둔촌선생과 최사간'이란 이야기로 후손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제총화(慵齋叢話)』를 비롯하여 『둔촌선생유고(遁村先生遺稿)』, 『유사(遺事)』, 김시양의 『자해필담(紫海筆談』,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고문서인 '통문(通文)'등에 실려 있는데,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둔촌할아버지는 일찍이 송경 용수산(松京 龍首山) 아래에 사셨는데 할아버지께서 고려 공민왕 무신년(서기 1368년)에 요승 신돈의 비행울 대중앞에서 논박하였으므로 채판서(蔡判書)의 밀고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까하여 노환이신 부친[당(唐)할아버지]을 업고서 천리 먼길을 남(南)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낮에는 사람을 피하여 산 속에 숨고 밤을 이용하여 내려오시니 굶주림과 야수의 내침과 추적자의 두려움을 싸우시며 경북 영천에 사는 사간(司諫)을 지낸 할아버지의 친구 최원도(일명 : 최사간) 집에 당도하게 되셨다. 마침 최공 댁에는 생신 잔치가 있어서 빈객이 많이 모여 있었다.
    행낭채에 들어서 기별을 드리니 최공이 나와서 냉대하면서 하는 말이 "자네 집이나 망하지 남의 집까지 망하게 하려고 하느냐" 하면서 괄시하고 쫓아버린 뒤에 둔촌할아버지가 머무른 행랑채 마저 불태워 버렸다. 이것을 본 손님들은 너무나 냉정한 일이라고 비소하고 돌아갔다.
    저녁이 되어서 손님들이 다 흩어진 후에 최공은 혼자서 등불을 들고 동구 밖 솔 밭쪽으로 나왔다. 이와 같이 쫓겨난 생원공[당(唐)할아버지]께서는 나는 늙어서 이제 죽어도 한이 없으니 나를 두고 네 몸이라도 피신하여 화를 면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둔촌할아버지께서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동구 밖 솔밭가에 부자분이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최공이 우리를 그대로 괄시하지는 아니할 것이니 여기에 은신하여 기다려 보자하시고 솔밭속에 숨어 계시니 최공이 밤늦게 등불을 들고 나와서 여기에 "이우(李友)는 여기 있는가?, 없는가?" 하며 찾았다.
    부자분이 최공 앞에 나서니 최공은 먼저 사과하는 말이 낮에는 여러 사람 눈을 피하기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니 내 참마음이 아니니 널리 양해하여 달라고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같이 와서 낮에는 다락에 숨고 밤이면 골방에서 쉬게 하였다. 그리고 최공이 안에 부탁하기를 요사이 내가 허기증이 자주나니 특히 큰 밥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오라고 하여 그 밥을 삼등분하여서 세분이 나누어서 먹게 되었다.
     
    그 때 여종(제비)이 밥상을 들고 나가니 골방안에서 사람소리가 남으로 수상히 여기고 안에 들어가서 마님께 말하기를 서방님이 아마 여자를 골방에 숨겨두신 것 같다고 말소리 들은것을 밀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최공이 볼일이 있어서 안방에 들어가니 부인께서 점잔케 하시는 말이 하배(아랫)것들 보기에 치사스럽게 어찌 골방에 여자를 숨겨두느냐고 하니 최공은 아무 말 없이 부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로서 부인은 눈치를 채고서 행여 말을 하여 가문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고서 그 자리에서 스스로 혀를 잘라버리고, 여종(제비)도 말이 새어 나가서 주인댁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자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비의 무덤을 마을 어귀의 솔밭사이에 고이 장사지내 주어서 고인의 넋을 위로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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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당(唐) 할아버지 묘소 아래쪽에 있는 연아총(燕娥塚-제비무덤)
     
    그리고 그 후로는 오늘날까지 시조산소(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2동)에 묘사를 지낼 때는 제비의 묘에도 박주 일배를 올리고 기리 고혼을 위로해주고 있으니, 지금 마을 어귀 솔밭속에 연비지묘(燕陴之墓)란 작은 표석이 서있는 초라한 작은 무덤을 볼 수가 있다.
     
    생원공[당(唐)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최공가(家)에서 피신해 계신지 일년만인 다음해에 별세하시니 최공께서는 친상을 당한 것 같이 슬퍼하시어 초상 범절을 친상과 다름없이 정성껏 하시고 행여 말이 날까 염려한 나머지 자기 부인을 피신시키고 처(妻)의 상을 당한것 같이 가장하고서 조객을 마지 하였다.
    이 내막을 잘 아는 하인이 포상을 받기 위해서 관가에 밀고하였다. 그래서 포졸이 몰려와서 관을 열어 보자고 윽박지르고 있는데 그 때의 둔촌할아버지께서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시다가 화가 최공께 미치게 되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뛰쳐나와서 나를 잡아가거라 관은 절대로 열 수 없다고 달려드니 포졸들은 둔촌할아버지를 결박하여 갈려고 하는 찰나에 관원이 급하게 달려오며 하는 말이 생원공의 상소하신것이 가납되어서 죄가 무사히 되었으니 결박한 것을 풀어 주라고 한것이다. 그래서 위기 일발에 면화하게 되었다.
     
    그 전에 신돈은 나졸을 풀어서 둔촌할아버지 부자(父子)를 체포할려고 인근 고을을 샅샅이 뒤지게 되었으나 사람들의 말이 최사간이 이공을 쫓아내고 행랑채마저 불살랐다는 말에 최공의 마을엔 오지도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곤경을 겪고서 최공은 자기 산에 장사 지내게 하였는데 최공 모(母)부인 묘소 아래쪽으로 불과 백보 내 지점이다. 이 곳이 이른바 조선팔대(朝鮮八大) 명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만대 영화지라고 한다.
     
     
    둔촌할아버지와 최사간의 이야기는 옛날 선조들의 우정과 의리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일화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 광주이씨로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한 명가의 태동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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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이씨 세계실록(17세기) ]

     

    『광주이씨 세계실록』에는 시조 이당할아버지의 혼인에 대한 일화가 있어 이를 소개한다. 전해오기를 선조 당(唐)할아버지는 광주고을의 아전이었다.  

     

    태수가 낮에 꿈을 꾸었는데 황룡이 뜰 안의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을 보았다. 놀라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보고 오라고 하였더니, 이모(李某)란 자가 나무에 다리를 대고 낮잠을 자고 있더라고 보고 하였다. 태수가 기이하게 여겨 곧 불러서 말하기를 "나에게 병든 딸이 있는데,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눈으로 볼 수가 없으며, 한편 어질지도 못할 뿐만아니라 두 귀는 듣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대의 베필로 삼고자 하노라." 하고 드디어 길일을 택하여 장차 혼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하루가 되어 집안 사람이 비단 자르는 칼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신부가 이르기를 칼이 창 안쪽에 있다고 말하였다. 혼인한 후에는 눈이 뜨여 걸음도 잘 걷고 모든 병이 다 완쾌되니, 당시의 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 하면서 진실로 하늘이 정한 베필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다섯 아들을 낳으니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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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이씨 족보(1724년) ]
    1724년과 1796년에 간행된 광주이씨 족보이며 통상 갑진보(甲辰譜)와 병진보(丙辰譜)로 알려져 있다.  

     

     

    본래 광주이씨가에서는 기존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주관하여 만든 족보(초간본) 1책이 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지나면서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1610년에 이르러 경술보(庚戌譜-재간본) 1책이 간행되었었는데, 여기에는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서문이 쓰여져 있다.

     

    경술보 이후 100여년이 지난 뒤 발간된 1724년 갑진보는 3간본, 그리고 1796년에 나온 병진보는 4간본에 해당된다. 이후에도 광주이씨가에서는 계속해서 족보의 발간이 이어졌다.

    1724년에 간행된 갑진보는 이승원(李承源)이 서문을 쓰고 상,중,하 3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먼저 상계에 해당하는 둔촌이하육대(遁村以下六代)를 시작으로 병조참의파, 광릉부원군파, 문경공파등 각 파별로 수록하고 있다. 수록의 대체적인 기준은 여자계열로는 외손(外孫)의 이름까지만 기록하고, 자녀는 선남후녀(先男後女)로 기록하였으며, 서자(庶子)는 적녀(嫡女)의 다음에 놓았다.

     

    1796년에 간행된 병진보는 이상도가 서문을 쓰고 7권7책으로 구성되었다. 수록의 기준은 이전의 갑진보와 마찬가지로 외손까지 기재하고 자녀는 선남후녀로 하였으며, 서자는 역시 적녀(嫡女) 뒤에 표기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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