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향토문화유적 지정서와 둔촌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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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1 22:34 조회 555회 댓글 0건본문
[경기도(京畿道)의 인육(人育)] - 경기도사초(京畿道史抄)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때의 내사령(內史令)이고, 중흥(中興)의 조(祖)는 고려(高麗)말의 학자인 이집(李集)이다.
이집(李集)이 살았던 광주군(廣州郡) 구천면(九川面) 일대에는 둔촌동(遁村洞) ㆍ 둔촌골(遁村골) ㆍ 둔촌약수(遁村藥水) 등 둔촌(遁村)이라는 이집(李集)의 호가 붙은 지명이 많다.
이집(李集)은 이당(李唐)의 아들로서 그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5子登科) 광주이씨(廣州李氏) 중흥(中興)의 핵심이 되었다. 이집(李集)은 정몽주(鄭夢周) ㆍ이색(李穡) 등과 교유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17年(1368)에 신돈(辛旽)을 논박하고 영천(永川)으로 피신하였다가 신돈(辛旽)이 주살된 후 개경(開京)에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집(李集)은 이지직(李之直)참의(參議) ㆍ지강(之剛)좌참찬(左參贊) ㆍ지유(之柔)성주목사(星州牧使) 등 세 명의 명관(名官)아들을 두었다. 이지직(李之直)은 이장손(李長孫)사인(舍人) ㆍ인손(仁孫)우의정(右議政) ㆍ예손(禮孫)관찰사(觀察使) 등 명관(名官) 아들을 다시 두어 명문(名門) 인맥(人脈)을 이어나갔다.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 다시 「5자등과(5子登科)」하여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일대 중흥(中興)을 이루었다.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 이극배(李克培)영의교(領議敎) ㆍ 극감(克堪)판서(判書) ㆍ극증(克增)공신(功臣) ㆍ극돈(克墩)좌찬성(左贊成) ㆍ극균(克均)좌의정(左議政)이고 「5자당상(5子堂上」의 영예 속에서 각기 화려한 광주이씨(廣州李氏) 지맥(支脈)을 뻗었다.
이극감(李克堪)의 아들이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이고 이세좌(李世佐)의 손자(孫子)로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윤경(李潤慶)과 영의정(領議政) 이준경(李浚慶)이 있으며, 이극균(李克均)의 4代孫(4대손)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이고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 영의정(領議政) 이덕형(李德馨)이다.
이덕형(李德馨)은 「혼조 3이(昏朝 3李)」라 하여 이항복(李恒福 ㆍ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왜란(倭亂)에 짓밟힌 사직(社稷)을 지탱한 명신(名臣)이고 정치적 명성 뿐만 아니라 학행(學行)도 높았다.
이덕형(李德馨)의 7대손이 한국(韓國) 천주교(天主敎)의 사상적 바탕을 이룩한 서학(西學)의 선구자인 이기양(李基讓)이다.
[조선(朝鮮)의 건국(建國)과 토착세력(土着勢力)] - 성남시지초(城南市誌抄)
광주지방(廣州地方)에서 그 대표적(代表的)인 존재(存在)를 이당(李唐)과 이집(李集)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광주목인물조(廣州牧人物條)의 이집(李集)을 보면, 「이당(李唐)은 本州(廣州)의 관이(官吏)이다.
근칙(謹飭:공손하고 삼가다)하여 현행(賢行)이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登科)하였는데 集은 그 둘째 아들이다. 초명(初名)은 원령(元齡)이고 고려충목왕(高麗忠穆王) 때에 등제(登第)하였는데, 문장(文章)과 절개(節介)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색(李穡) ㆍ정몽주(鄭夢周) ㆍ이숭인(李崇仁) 등과 서로 존경하는 친구였다.
일찍이 적승(賊僧)인 신돈(辛旽)에게 반항하여 바야흐로 저를 붙잡아 죽이려 하자 몰래 그의 아버지인 당(唐)을 업고 낮에는 숨고 밤길로 영천(永川)으로 도망하여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숨어 살았다. 1371年 공민왕 20(恭愍王 20) 신돈(辛旽)이 살해되자 비로소 돌아왔다.
이름을 集으로 고치고 字를 호연(浩然), 호(號)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벼슬하는 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로 있다가 얼마 안되어 여주천녕현(驪州川寧縣)에 퇴거(退居)하여 몸소 농사하고 독서하는 일로 소일(消日)하였다. 때에 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해 정몽주(鄭夢周)에게 문의하니 정몽주가 글을 보내 탄복하였다.
공양 정묘(恭讓 丁卯 1387: 辛禍 13)에 죽으니 몽주(夢周) ㆍ숭인(崇仁) 등이 모두 시(詩)를 지어 통곡(痛哭)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광주이씨(廣州李氏)의 始祖(一代)로 되어 있는 이집(李集)의 선대(先代)인 이당(李唐)이 광주주리(廣州州吏)였다는 사실과 또한 주리(州吏)의 다섯 아들이 등제(登第)하고 있음에 유의(留意)할 필요가 있다.
이는 주리(州吏)로서 등제(登第)하였거나 이족출신(吏族出身)에서 등제(登第)하였거나 문(文)ㆍ리(吏)에 능했던 사실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향리(地方鄕吏)의 신분(身分)으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당당한 관인(官人)으로 진출할 때에 도필(刀筆)을 가업(家業)으로 삼아오던 실무기술적(實務技術的) 전통(傳統) 위에 문학적(文學的) 교양(敎養)을 아울러 구비(具備)하여 능문능리(能文能吏)외 신관료(新官僚)로서의 새로운 관인층(官人層)이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능문능리(能文能吏)의 관인층(官人層)은 곧 사대부계급(士大夫階級)이었다. 그럼으로써 광주이씨(廣州李氏) 세보상(世譜上)에는 새로운 관인층(官人層)으로 등장(登場)하는 이집(李集)을 그 시조(始祖) 일대(一代)로 모시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대종회 참조==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때의 내사령(內史令)이고, 중흥(中興)의 조(祖)는 고려(高麗)말의 학자인 이집(李集)이다.
이집(李集)이 살았던 광주군(廣州郡) 구천면(九川面) 일대에는 둔촌동(遁村洞) ㆍ 둔촌골(遁村골) ㆍ 둔촌약수(遁村藥水) 등 둔촌(遁村)이라는 이집(李集)의 호가 붙은 지명이 많다.
이집(李集)은 이당(李唐)의 아들로서 그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5子登科) 광주이씨(廣州李氏) 중흥(中興)의 핵심이 되었다. 이집(李集)은 정몽주(鄭夢周) ㆍ이색(李穡) 등과 교유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17年(1368)에 신돈(辛旽)을 논박하고 영천(永川)으로 피신하였다가 신돈(辛旽)이 주살된 후 개경(開京)에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집(李集)은 이지직(李之直)참의(參議) ㆍ지강(之剛)좌참찬(左參贊) ㆍ지유(之柔)성주목사(星州牧使) 등 세 명의 명관(名官)아들을 두었다. 이지직(李之直)은 이장손(李長孫)사인(舍人) ㆍ인손(仁孫)우의정(右議政) ㆍ예손(禮孫)관찰사(觀察使) 등 명관(名官) 아들을 다시 두어 명문(名門) 인맥(人脈)을 이어나갔다.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 다시 「5자등과(5子登科)」하여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일대 중흥(中興)을 이루었다.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 이극배(李克培)영의교(領議敎) ㆍ 극감(克堪)판서(判書) ㆍ극증(克增)공신(功臣) ㆍ극돈(克墩)좌찬성(左贊成) ㆍ극균(克均)좌의정(左議政)이고 「5자당상(5子堂上」의 영예 속에서 각기 화려한 광주이씨(廣州李氏) 지맥(支脈)을 뻗었다.
이극감(李克堪)의 아들이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이고 이세좌(李世佐)의 손자(孫子)로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윤경(李潤慶)과 영의정(領議政) 이준경(李浚慶)이 있으며, 이극균(李克均)의 4代孫(4대손)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이고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 영의정(領議政) 이덕형(李德馨)이다.
이덕형(李德馨)은 「혼조 3이(昏朝 3李)」라 하여 이항복(李恒福 ㆍ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왜란(倭亂)에 짓밟힌 사직(社稷)을 지탱한 명신(名臣)이고 정치적 명성 뿐만 아니라 학행(學行)도 높았다.
이덕형(李德馨)의 7대손이 한국(韓國) 천주교(天主敎)의 사상적 바탕을 이룩한 서학(西學)의 선구자인 이기양(李基讓)이다.
[조선(朝鮮)의 건국(建國)과 토착세력(土着勢力)] - 성남시지초(城南市誌抄)
광주지방(廣州地方)에서 그 대표적(代表的)인 존재(存在)를 이당(李唐)과 이집(李集)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광주목인물조(廣州牧人物條)의 이집(李集)을 보면, 「이당(李唐)은 本州(廣州)의 관이(官吏)이다.
근칙(謹飭:공손하고 삼가다)하여 현행(賢行)이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登科)하였는데 集은 그 둘째 아들이다. 초명(初名)은 원령(元齡)이고 고려충목왕(高麗忠穆王) 때에 등제(登第)하였는데, 문장(文章)과 절개(節介)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색(李穡) ㆍ정몽주(鄭夢周) ㆍ이숭인(李崇仁) 등과 서로 존경하는 친구였다.
일찍이 적승(賊僧)인 신돈(辛旽)에게 반항하여 바야흐로 저를 붙잡아 죽이려 하자 몰래 그의 아버지인 당(唐)을 업고 낮에는 숨고 밤길로 영천(永川)으로 도망하여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숨어 살았다. 1371年 공민왕 20(恭愍王 20) 신돈(辛旽)이 살해되자 비로소 돌아왔다.
이름을 集으로 고치고 字를 호연(浩然), 호(號)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벼슬하는 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로 있다가 얼마 안되어 여주천녕현(驪州川寧縣)에 퇴거(退居)하여 몸소 농사하고 독서하는 일로 소일(消日)하였다. 때에 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해 정몽주(鄭夢周)에게 문의하니 정몽주가 글을 보내 탄복하였다.
공양 정묘(恭讓 丁卯 1387: 辛禍 13)에 죽으니 몽주(夢周) ㆍ숭인(崇仁) 등이 모두 시(詩)를 지어 통곡(痛哭)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광주이씨(廣州李氏)의 始祖(一代)로 되어 있는 이집(李集)의 선대(先代)인 이당(李唐)이 광주주리(廣州州吏)였다는 사실과 또한 주리(州吏)의 다섯 아들이 등제(登第)하고 있음에 유의(留意)할 필요가 있다.
이는 주리(州吏)로서 등제(登第)하였거나 이족출신(吏族出身)에서 등제(登第)하였거나 문(文)ㆍ리(吏)에 능했던 사실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향리(地方鄕吏)의 신분(身分)으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당당한 관인(官人)으로 진출할 때에 도필(刀筆)을 가업(家業)으로 삼아오던 실무기술적(實務技術的) 전통(傳統) 위에 문학적(文學的) 교양(敎養)을 아울러 구비(具備)하여 능문능리(能文能吏)외 신관료(新官僚)로서의 새로운 관인층(官人層)이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능문능리(能文能吏)의 관인층(官人層)은 곧 사대부계급(士大夫階級)이었다. 그럼으로써 광주이씨(廣州李氏) 세보상(世譜上)에는 새로운 관인층(官人層)으로 등장(登場)하는 이집(李集)을 그 시조(始祖) 일대(一代)로 모시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대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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