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만(李宜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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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9:00 조회 1,931회 댓글 0건본문
1650(효종 1)∼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응(善應), 호는 농은(農隱). 충정공 준경(忠正公浚慶)의 5대손이며 후징(厚徵)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禹仁秀〉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禹仁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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