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만(李蓍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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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8:52 조회 1,572회 댓글 0건본문
1641(인조 19)∼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응(定應), 호는 동애(東厓). 후징(厚徵)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통덕랑으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녹선되었다.
1683년 부수찬으로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8년 수찬이 되고, 1689년 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어, 지난해 희빈 장씨(嬉嬪張氏)소생인 왕자의 명호(名號)를 정하는 일과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서인의 거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이 시기상조라고 상소한 것에 논박하여 이들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남인이 세력을 잡은 이른바 기사환국을 불러일으켰다.
1690년 대사간이 되고, 1693년 도승지에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號譜. 〈金龍國〉
1678년(숙종 4) 통덕랑으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녹선되었다.
1683년 부수찬으로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8년 수찬이 되고, 1689년 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어, 지난해 희빈 장씨(嬉嬪張氏)소생인 왕자의 명호(名號)를 정하는 일과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서인의 거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이 시기상조라고 상소한 것에 논박하여 이들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남인이 세력을 잡은 이른바 기사환국을 불러일으켰다.
1690년 대사간이 되고, 1693년 도승지에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號譜. 〈金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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