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장(李道長 1603년 : 선조36 ~ 1644년 : 인조22
문신, 자는 태시, 호는 낙촌, 본관은 광주. 참의 윤우의 차자로서 영우에게 출계하였다.
정한강 장여헌의 문인으로 1630년(인조 8)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정자에 등용되고 이어 주서, 검열, 사근도찰방, 지평 등을 거쳐 인조 16년에는 홍문록에 피선되고, 그 후 부수찬, 지평, 정언, 부교리, 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공은 학문이 뛰어나 인조 16년 12월, 지제교에 초선된후 교리, 헌납, 이조정랑, 사간, 부응교 등을 거쳐 합천군수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병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니 왕후비빈과 대신가족들은 이미 강화도로, 피난가고 적의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진격하여 옴에 당시 도제찰사 김유가 아무방비도 없이 국왕을 강화로 파천(播遷)할 것을 주청함에 공이 이를 반대하여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병력을 보내어 적병의 진격을 늦추게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파천을 하게 하되 혹시 도중에 어떤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 인군지인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강화의 안위를 확인한 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진언한 바있다.
그 후 치욕적인 강화를 체결한 수 청의 진영에서 두 왕자를 인질로 하는 한편, 척화를 주장한 자의 명단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대신들은 서로 집필을 기피하여 공에게 권유하니 하는 수 없이 붓을 잡으니, 전후좌우에서 척화자의 명단을 빠짐없이 불렀으나 공은 삼학사의 이름만 쓰고는 붓을 놓고 강개한 태도로 말하기를 적의 요청은 사람의 수를 정한바 없는데 우리 스스로 많은 사람을 적어 더 많은 희생을 낼수는 없지 않느냐 하였다.
이렇게 예리한 지혜로 결국은 많은 인명을 구한 일화가 있다. 1644년 향년 42세로 졸하니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집이 있다. 고령군 타산면 곽촌동에 묘소가 있으니 우의정 허목이 비문을 지었다.
[문헌(文獻)]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칠곡부읍지(漆谷府邑誌), 거주지, 낙촌집(洛村集)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