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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경(李浚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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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7:05 조회 1,83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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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권력이 옮겨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할아버지는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다.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사되었으며 그도 이에 연좌되어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李延慶)과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 일파에 밀려 파직당했다.

이후 문밖 출입을 끊고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정진했다.

1537년에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직제학·승정원승지·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0년 정적(政敵)이었던 이기(李芑)의 탄핵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복귀했다.

1553년에 함경도순변사로서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을묘왜변 때는 전라도도순찰사로서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와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1558년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기간에 국정을 주도하여, 척신 윤원형(尹元衡)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1572년(선조 5) 국가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遺疏)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朋黨)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현실화되었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東皐遺稿〉·〈조선풍속 朝鮮風俗〉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黨議通略, 朝鮮名人傳(申奭鎬外, 朝光社, 1939). 〈申解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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