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2(세종 4)∼1495(연산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峰).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고, 이어 감찰이 되었으며,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정언·지제교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지난번 명나라에 갔을 때 검찰직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어 병조 겸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는 데의 공이 인정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1457년(세조 3) 예조참의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어 광릉군(廣陵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병조참판과 예조참판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1459년 북변의 야인정벌 때 신숙주(申叔舟)의 종사로 출전하였고, 돌아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 이래 호조·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는 평안도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선무하여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어 평안도관찰사에 올랐다.
예종 때에는 우참찬이 되고, 이어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었으며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481년부터 2년 동안의 대기근이 발생하였을 때에 진휼사(賑恤使)로서 활약하였으며,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년 우의정이 되었고, 1493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하였으며, 다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하였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고 행정의 재능을 겸하였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데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