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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종중 - 유물/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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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8-01-30 01:35 조회 2,18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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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명 고신(告身_ 경상도관찰사)과 영영장계등록]




① 중앙 상단 : 이담명 고신 - 경상도 관찰사
② 중앙 하단 : 영영장계등록




[이담명 고신 - 경상도관찰사]

1690년 l 56.3 x 79.3


1690년 (숙종16)에 이담명이 가의대부 경상도관찰사가 되면서 국왕명의로 받은 임명장이다. 이때 가의대부는 종2품의 품계인데, 실제 직위 역시 이에 상응하는 품계를 받았다. 이담명이 관찰사에 임명된 시점은 7월 3일인데, 실제로 부임한 시기는 8월이 되어서였다.

이담명은 경상도에 부임하여 재해에 처한 백성들을 살리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일로 인해 뒤에 도민들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영영장계등록(嶺營狀啓謄錄)]

신수 l 1690년~1691년 l 41.4 x 24.3 x 2.7


이 등록은 이담명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시절(1690년~1691년) 증앙에 올라가는 장계를 등사하여 둔 자료이다.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것은 당시 이 지방에 기근이 일어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를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취해진것이었다. 이에 따라 장계의 내용 역시 기민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등록의 내용은 1690년 8월부터 이듬해 7월에 이르기까지 주로 영남감사로서 해당 지방의 형편을 조정에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주요 내용을 들면, 8월 14일에는 처음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시기로 날씨 변화에 따른 곡식의 형편을 자세히 보고하고 있으며, 아울러 8월 17일에는 이전에 조정에 있을 때에 자신이 언급한 것퍼럼 곡식 20만석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충청도 10여읍의 곡식을 옮겨 달라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11월 19일에는 각 읍의 기민 상황을 다시 보고하고, 관에서 비춧한 곡식을 백성에게 분급해서 구황하겠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12월 2일에는 세말이 되어서 유리하는 이들이 도로에 가득 차 있으며, 도처의 부락 10여집중 9개가 비어 있다고 하는 등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였고, 따라서 통영으로 옮기여는 2만 2천석의 곡식에 대해서는 이송하지 않고 각 읍에 두고 내년 봄의 휼민의 자산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이담명은 아마도 이 장계를 마지막으로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휼민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인해서 조정에서는 이담명에 대한 추고 논의(12월 23일)가 강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조정의 일부 중신들은 이담명이 조정의 허가 없이 마음대로 구휼함으로써 영남 백성들은 관찰사의 은혜에 감사하고 조정을 미워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그를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이에 대해 당시의 조처가 시의 적절하였다는 의견도 있어서 커다란 화는 모면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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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번역문]

장계등록에 수록된 내용 중에서 12월 2일에 장계에 대해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2월 2일 장계』

본도(本道)의 흉황(凶荒)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갖추어 아뢰었거니와 세밑에 이르기 전에 떠돌이 거지들이 길에 가득히 도처의 마을에서 열집 중에서 아홉이 비어 있으니 보이는것이 참혹합니다. 각 읍의 보고에서는 이래저래 말이 많으며, 이제 곧 절박한 것은 장차 굶어 죽을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가 바야흐로 절실한데, 계속할 대책이 없고 구휼하려니 손 하나 댈 수도 없어서 걱정입니다. 오직 봄이 시작되기를 기다려 진휼을 한다면 엄청나게 공핍한 상황이 상상될 뿐입니다.

통제사 장계에 따르면 바닷가에 있는 곡식 2만 2천 석을 가져다 쓸 일로 소청을 얻었다고 합니다. 통영에서는 연해 각 읍에 분정(分定)하여 지금 운송하기를 독촉해야 하니 재난을 입은 각 읍의 백성들은 추수 할 수 없는 땅, 식량이 텅 빈 집에서 어찌 존속할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는 국법을 두려워하고 아래에서는 이듬해 봄 먹을 계책을 위하여 며칠씩 굶주림을 참으며 멀리 가서 물건을 바꾸며 수만 가지 방법으로 끼니를 해결합니다. 수 없는 고통으로 얻는 대로 갖추어 납부해야 할 바를 따르나, 이미 납부 한 이후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창고의 재물이 없으니 그 재물이 아니어도 해를 지난 다음에는 의뢰하여 살 수 있다고 하다가. 지금 홀연히 통영으로 옮기는 것을 보면 마침내 통영 진영의 별졸 모리배의 재산이 될 것이요, 납부한 궁핍한 백성들에게는 도리어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이른바 오직 까치가 집을 만드는데 비둘기가 거처하는 것이니, 일이 지극히 원통하고 형세가 심히 절박할 뿐만이 아닙니다. 도내에서 받아야할 환자(還上)의 실재 수량을 지금 비록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대저 2만 2천석의 곡식을 잃어버리면 내년 봄의 진휼 정책은 결코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허다한 생민(生民)들에게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통영은 비록 각 진영의 토졸(土卒)을 진휼한다고 핑계할 지라도, 통영 소속의 각 진영은 모두 바닷가의 좀 넉넉한 땅에 있으므로 비록 각 진영이 스스로 마련한 곡식과 각 진영이 스스로 마련한 곡식과 각 진영의 환자곡(還上穀)으로 토졸에게 나누어 주게 되더라도 또한 족히 구황 할 수 있을 것이며, 통영은 1년의 방료(放料_나라에서 주는 녹봉)가 9,000여석인데, 신(臣)이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에 바닷가와 강의 읍들의 환자(還上) 곡물을 통영으로 부터 분주하게 운반해 간 것이 그 수가 이미 많으며, 곧 지금 통영의 어세(漁稅)와 선세(船稅)로 잡곡을 매매하는 것이 또한 수만석이어서 영(營) 중의 수용은 저축이 없음을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통영은 장황한 논계(論啓)로 이와 같이 운반을 독려하니 진실로 잘 알지 못하는 바이오며, 통영 근처 연해 여러 읍의 한해 농사는 중도(中道(도내의 중간)에 비하면 조금 낫기에 신(臣)은 그곳의 곡물이 남음이 있으면 중도로 옮겨서 중도의 백성을 구하고자 합니다. 지금 통영에서는 재해 지역의 곡식을 옮겨 조금 나은 지역으로 채우려 하니 완급(緩急)이 도치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비록 각기(관청에서) 담당하는 바가 있다고는 하나, 지금 영남의 흉황은 근자에는 없었던 것이며, 수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여 떠들며 구렁에 뒹구는 참혹함이 조석(朝夕)에 임박하였습니다. 비록 몇몇 호구에서 의기 있는 사람이 있어 그의 사재를 털어서 관청의 진휼을 보완한다고 하지만 함께 구제하는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부를 더하는 꾀를 생각하여 이러한 운송을 독려하려는 일이 있으니. 신(臣)은 실로 취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2만 2천석의 곡물은 우선 이송하지 말고 각 읍에 받아 두어서 이듬해 봄의 진훌할 자산으로 삼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합니다. 특별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사유를 갖추어 계(啓)를 올립니다.


경오년(1690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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