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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종중 - 유물/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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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역사박물관 기증 종중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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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8-01-30 01:49 조회 3,32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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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문, 경신일록, 편보]




① 우측 상단 : 계문(啓文) - 1674년 l 35.0 x 268.0
② 중앙 하단 : 경신일록(庚申日錄) 비망기 부문) - 1680년 l 34.0 x 22.2
③ 좌측 하단 : 편보(便譜) - 19세기 l 34.5 x 21.5



[계문(啓文)]

1674년 (숙종 즉위년) 12월경 장령 남천한, 지평 이옥등이 송시열이 효종에 대해 예를 잘못 적용하여 국가의 대례를 어지럽힌 죄를 물어 그를 처벌하자는 목적으로 올린 계이다.

이러한 계가 올라간 것은 현종대에 일어난 갑인예송에서 송시열이 취한 입장에 대해 문재가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1674년 2월에 효종비인 인선화후(仁宣王后) 장씨(張氏)가 죽자 모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 때에 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대공복(大功服)으로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현종으로 부터 예법이 잘못 적용되었다는 추궁을 받으면서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해졌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측 인사들이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8월 12일 현종이 승하하였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숙종초에는 역시 남인들이 등용되었고, 이에 따라 송시열을 파직하고, 벌을 주어야한다는 계(啓)나 상소가 연이어 올라가기도 하였다. 이 계문은 이러한 시기에 작성되어 올라간 것 중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내용에 의하면 "송시열은 본인 일신의 오류를 가지고 국가의 대례(大禮)를 혼란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정적(正嫡)이며 차장(次長)인 효종을 함부로 천하게 칭하여 10년 재위하신 효종을 적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송시열에게 삭출하는 벌을 내려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하가 올린 계문에 대해서는 계하인(啓下印)이 찍어서 윤허하였음을 표시하기도 하는데, 또 다른 하나의 문건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경신일록(庚申日錄) - 숙종조 경신환국의 일지(日誌)]

1680년(숙종6) 소위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남인들이 대거 물러나고 서인정권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여파로 남인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죽게 되었는데, 이 때 이원정도 장하(杖下)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자료는 이 때의 일에 대하여 날짜별로 작성된 기록으로 1680년(숙종6) 3월 30일부터 6월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작성자는 미상이다. 내용은 이 시기에 발생한 남인에 대출척을 시작으로 허견(許堅)의 옥사 등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시기상으로 8월달에 일어난 '정원로(鄭元老)의 옥사'와 그로 인한 이원정의 사망에 대한 기사는 누락되어 있다.

처음에는 3월 30일 비망기에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니, 이는 전날인 29일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직을 삭탈하고 내린 것이어서 앞으로 일어날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4월 13일에는 허견의 옥사로 인해서 국청에서 이들에 대한 추고가 있었다. 먼저 허적(許積)에 대해서는 형률로 논하면 아즐이 16세 이상이면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고변자의 초사(招辭)나 아들 견(堅)의 원정(原情)애 의하면 아비가 아들이 흉악하게 도모한 일을 몰랐고, 허적이 세 임금을 모신 신하였기 때문에 다만 가산(家産)을 모두 몰수한 후 직책을 빼앗고 석방하여 시골로 돌아가게 하라고 하였다.

윤휴에 대해서는 다만 (도체찰사부에 대해서) 힘써 주장할 뿐만 아니라 국왕 앞에서 부찰사(副察使)를 차출할 때 김석주가 맡도록 명을 내리니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을 드러내면서 군권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었으니 그를 위리안치(圍籬安置) 시키라고 하였다. (경신환국 이전에 남인들은 도체찰사부를 복설하는등 군권을 잡으려고 노력했던 사실이 있었는데, 이는 결국 뒤에 역모의 일환으로 오해를 받고 주요 인사들의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되었다.)

이원정에 대해서는 당초 도체찰사부의 설치에 대하여 긴요하지 않다고 했다가 그 후에 변방의 일로 보아서 복설해야한다고 하였기에 혐의가 있다고 하였다. 또 그는 허견의 일과 직접 연결되지 않더라도 국가의 중신으로써 그에게 속아서 이 같은 주장을 했다고 한다면 먼 곳으로 유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국청의 결과 이원정은 바로 초산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6) 정치적으로 남인이 주도하던 정국이 서인으로 바뀐 사건을 말한다. 사건의 발단은 처음 3월 28일 밤에 훈련대장을 유혁연에서 김만기로, 신여철을 총융사로 임명하면서 실질적인 군권을 가진 인물들을 교체하면서 촉발되었고, 그 다음날 이조판서인 이원정을 물러나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반면 유배가 있던 김수항을 불러들여 영의정에 임명하고, 정지화를 좌의정으로 남구만을 도승지로 임명하는등 대대적으로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4월 5일 정원로의 고변으로 '허견의 옥사'가 발생하면서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닌 대대적인 옥사가 발생하기에 이르렀고, 많은 남인들이 죽거나 귀양가게 되었다. 당시 남인정권을 대표하는 이들은 허적, 윤휴, 이원정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 『경신일록』중 비망기 부분

비망기에 '이조가 인사 행정의 일을 사정(私情)에 따른 것은 원정(元禎) 한 사람이 일조일석에 저지른 죄일 뿐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대강 벌을 내렸다. 국가에 삼공(三公)이 있는데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는 것을 힘쓰지 않고 편안하게만 날을 보내면서 서로 관망하는것 같음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충성으로 나라를 지탱하는 도리이겠느야? 나는 항상 한심하게 여긴다. 승정원은 알지어다."

● 『경신일록』중 이원정 관련 기사부분

임금께서 이르기를 " 이원정은 당초 '도체찰사부의 설립은 긴요하지 않다하여 마땅히 속히 혁파해야한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복설에 대해서 '남쪽과 북쪽지방에 경보(驚報)가 있어서 불가불 복설해야한다.'고 말했으니, 그 때의 원정에 대해서는 또한 '신하의 한 일이 전후가 같지 않는 혐의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 이러한 말들은 정원로의 초사(招辭)에서 나왔고 비록 이 때문에 흉악스런 일을 알고 참여했다고 의심할 수는 없으나, 중신이 되는 사람으로서 역적 견(堅)에게 속아서 복설하는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극히 놀랍도다, 극변으로 멀리 유배하는 것이 가하다."....이원정이 이산(초산)으로 유배되었다.




[편보(便譜)]

남인들의 족보이다. 통상 『남보(南譜)』라고 하는 것으로 필사본이며 19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도서는 조선시대 당정정치가 극대화 되었을 때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앙에서 남인들의 세력이 약화된 이후 그들만의 계보를 작성하여 남겨둔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형식으로는 북인들이 제작한 북보(北輔)도 있다.

본문에서는 전주이씨부터 가문별로 계보를 간략하게 기록해 두었다. 계보와 그에 따른 성명, 아울러 성명 앞에는 관직, 과거급제의 여부등을 표기해 두었다. 또한 성명 좌측에는 붉은 색으로 표식을 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과거급제나 관직의 재직여부등을 알기 쉽게 표기한 것이다. 대체로 문과 합격자의 경우에는 붉은 색으로 동그라미 두개를 그려서 표시하고, 생원이나 진사의 경우에는 점 두개를 찍어 두었다. 또한 사마시를 하지 않은 경우에도 관직을 지냈으면 마찬가지로 점 두개를 찍었다. 아울러 여말이나 조선초기의 인물중에서는 봉군(封君)되거나 고관직을 지내는 등 비중이 큰 인물은 별도로 동그라미 세개를 표시하였다. 도서에 등재된 성씨들은 이씨를 비롯하여 4책에 걸쳐 기술되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제1책[元(원)]

이씨(李氏)이며 본관은 전주, 연안, 한산, 광주, 경주, 여흥, 함평, 창평, 진보, 전의, 재령, 고성, 성주, 신평, 광양, 영천, 우계, 예안, 양성, 흥양, 함안, 원주, 인천.

● 제2책[亨(형)]

김씨(金氏)로 본관은 안동, 경주, 선산, 원주, 강릉, 의성, 풍산, 광주, 예안, 김해, 고령, 서흥, 순천, 청도, 해평, 함창, 정씨(鄭氏)로는 본관은 동래, 초계, 청주, 진주, 경주, 해주, 하동, 온양, 철원, 최씨(崔氏)로는 본관은 전주, 삭녕, 강릉, 강화, 영천, 화순, 밀양, 함양, 무안, 순천, 죽산, 박씨(朴氏)로는 본관은 함양, 무안, 순천, 죽산, 유씨(柳氏)로는 본관은 진주, 문화, 전주, 풍산, 안씨(安氏)로 본관은 순흥, 광주, 신씨(申氏)로 본관은 평산, 고령

● 제3책[利(리)]

송씨로 본관은 진천, 여산, 은진, 심씨로 본관은 청송, 허씨로 본관은 남양, 남씨로 본관은 의령, 영양, 고성, 성씨로 본관은 창원, 강씨로 본관은 진주, 오씨로 본관은 동복, 정씨로 본관은 나주, 채씨로 본관은 평강, 목씨로 본관은 사천, 유씨로 본관은 기계, 민씨로 본관은 여흥, 우씨로 본관은 단양, 조씨로 본관은 창녕, 옥천, 장씨로 본관은 인동, 노씨로 본관은 광주, 교하, 신씨로 본관은 거창, 서씨로 본관은 부여, 나씨로 본관은 나주, 안정, 전씨로 본관은 옥천, 평강, 도씨로 본관은 팔려, 하씨로 본관은 진주, 손씨로 본관은 경주, 일직, 배씨로 본관은 성주, 금씨로 본관으 봉화, 강씨로 본관은 재령, 변씨로 본관은 원주, 여씨로 본관은 성주, 고씨로 본관은 개성, 구씨로 본관은 능성, 문씨로 본관은 남평, 남궁씨로 본관은 함열, 변씨로 본관은 밀양.

● 제4책[貞(정)]

윤씨로 본관은 파평, 남원, 해평, 남원. 권씨로 본관은 안동. 한씨로 본관은 청주. 조씨로 본관은 한양, 양주, 풍양, 순천, 평양. 홍씨로 본관은 남양, 당성, 풍산, 부계. 황씨로 본관은 창원, 상주,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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