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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8-01-30 01:54 조회 2,223회 댓글 0건본문
1712~1713년 l 25.0 x 17.8
1712년(숙종 38) 5월17일 이원정의 손자 이세원이 조부의 신원을 위하여 몰래 대궐 단봉문(丹鳳門)으로 들어간 다음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격쟁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천감록은 이 사건과 과련된 기록물로 1712년~1713년간에 작성되었으며, 연월별로 정사기록의 형식을 띄었다.
이원정은 숙종 15년(1689)에 복관되었다가 숙종 20년(1694) 추탈되었는데, 이후 다시 숙종 38년(1712)에 이르러 재차 복관되었다.
이 때에는 전국적으로 혹독한 가뭄이 들었는데, 국왕은 선정의 차원에서 기존의 정치적 미신원자에 대해 해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이에 따라 격쟁을 통하여 복관을 성취한 것이다.
세원은 무단으로 궁궐에 난입해 격쟁을 하였고, 이 때문에 형조에 잡혀가서 공사(供辭_즉 진술)를 내게 되었다. 공사의 내용은 선조인 이원정에 대한 행적과 경신년(숙종6)의 억울한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사안은 군대의 사령부격인 도체찰사부에 대한 혁파와 설치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때 이원정이 처음으로 혁파를 주장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폐지를 언급하게 된 사정을 자세히 변론하였다.
처음 이원정은 정사년(1677) 대사간에 올랐을 때 당시의 여론에 따라 도체찰사부를 혁파하고 상소를 올린 바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뒤에 중국과의 변경 지역이 혼란해지면서 상황이 바뀌자 조정에서는 금군(禁軍)을 추가로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 때 논의를 주도한 이는 바로 척신인 김석주라는 것이었다.
이원정은 당시 병조판서였던 김석주의 강권과 여러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나중에 도체찰사부를 복설하고자 했던 것이며, 이는 역적이었던 허견과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이새원의 청원은 두 달 후 다시 논의에 부쳐지고 조부인 이원정은 신원되기에 이르렀다.
※ 격쟁이란?
일반인들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의 거동시에 징이나 꽹과리 또는 북을 쳐서 원통함을 국왕에게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격쟁을 하면 해당자는 일단 피의자로 간주되고 통상 형조에 잡아들여서 의례적으로 곤장을 친 다음 3일 이내에 그를 신문하여 공초를 받아내서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격쟁을 한다는 것은 본인의 신체적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의 극한 원통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세원의 경우에는 사전에 국왕의 비망기가 있었기 때문에 형벌에 대한 부담감이 다소 적었을 수도 있겠으나 조부를 위하여 극단적인 신원운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상함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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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감록』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국문 번역본)
● 『천감록』중 비망기 및 세원격쟁공사 부분
오호라 국가가 불행하여 천재가 거듭이르니 가뭄의 혹독함이 금년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다. 여름으로 들어온 이래 비가 내리지 않아서 낮에는 바람이 차고 밤에는 별이 희미하다. 비가 조금 오다가도 곧 개고 큰 비는 없었다. 보리는 이미 흉년이 들었고 이삭은 말라버린다. 지듬 비가 오지 않으니 어찌 가을 수확을 바라리오, 오호라! 국가가 믿는 것은 백성이요, 백성이 의지할 바는 먹을 것인데 백성은 먹을 것이 없고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임금 노릇하겠는가? (증략)
예전에 삼년 가뭄은 효부를 죽인 고을 원의 처사에서 비롯되었으며, 5월 서리는 충성스런 연나라 신하를 국왕이 옥에 가둔 일 때문에 발생했다고 하였으니 대개 원통함이 쌓이고 맺혀서 위로 하늘에 이르면 그 감응은 화평한 기운을 상하게 하여 재앙에 이르는 것이 또한 자연의 이치이다. (중략)
이에 경향의 관원으로 하여금 만일 지극히 억울함을 품고도 신원되지 못한 자가 있으면 특별히 자세히 살펴서 계문하도록 하라.
[세원이 격쟁하여 낸 공사]
저의 조부 신(臣_원정)은 경신옥사에 잘못 빠져서, 일신을 예측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고 원통함이 저승에까지 맺힌 것이 여러 해 되었습니다. 기사년(1689, 숙종 15)이 되어서는 성상의 깊은 마음이 감오되어 신하의 진정이나 자제의 송원(訟寃)을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긍휼한 마음으로 억울함을 씻고 관작을 환수하도록 하셨으니, 불 꺼진 재가 다시 타오르고 차가운 계곡에 봄이 오는듯 합니다. 임금님의 높고 풍성한 은택은 고금에 거의 드물고, 보고 듣는 이는 모두 감읍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중략)
요즘에 가뭄을 걱정하던 날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서 간절한 10줄의 전교는 말의 뜻이 슬픔으로 가득했으니 무릇 백성으로서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저승에서 원통하게 울던 귀신을 달래고, 멀고 오랫동안의 울적함을 풀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또한 마침내 교지를 내리시길 "이처럼 지극히 원통함을 안고 신원하지 못한 자를 자세히 살펴서 계문하도록 하라." 고 하셨습니다. (중략)
저의 조부는 정사년(숙종3, 1677) 여름쯤에 대사간의 직책을 받았을 때에 그때의 공론은 모두 도체찰사부를 긴요하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혁파되어야한다는 소(疏)로 아뢰었습니다. 그 후에 중국에서 다사한(_즉 일이 많은) 보고가 먼저 도착한 (중국 사신) 장계 중에 나와서 소요가 크게 일어났고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금군을 더 늘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조부께서는 금군을 더 설치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숙종 4년, 1678년) 구일절제(9월 9일에 치르는 과거시험)에서 병사를 주관하는 신하인 김석주가 저의 조부와 함께 성균관에 나아가 변방의 경계에 대해서 매우 우려하며 긴급한 책무를 강구하려 하면서, 저의 조부에게 이르기를 "금군을 더 설치하는 일을 영감이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변방에 우려됨이 있으면 도체찰사부를 복설해야하기에 지금 금군을 더 늘리어 체부를 복설하는 근본으로 삼으려 할 뿐입니다." 고 하므로 조부가 답하기를 "전에 도체찰사부를 혁파할 때에 내가 이미 그 뜻을 진달하였는데, 지금은 일의 형세가 전날과 다름이 있고 대감께서 병사를 주관하는 분으로써 마땅히 복설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곧바로 복설을 청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체찰사부를 복설하는 근본으로 삼으로 하면서 먼저 금군을 더 설치하기를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때에 자리에 있던 여러 대신들도 체부를 복설하는 일을 난감하게 생각하였는데, 김석주는 복설을 아뢰는 것을 끝내 그만둘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저의 조부께서 재삼 생각을 거듭하지는 않고 뒷날에 차대(次對)하여 과연 진달하였습니다.
대게 도체찰사부를 복설하자는 논의는 실로 그 단서가 있었던 것이며, 저의 조부는 조정에서 공의를 위하여 경연에 들어가 고한데 불과하였으니, 이는 또한 나라를 위한 지나친 우려 때문인 것이었습니다. (중략)
이에 감히 무릅쓰고 대궐에 들어가 징을 두드리고 임금님께 아뢰었습니다. 해와 달같은 총명함을 엎어 놓은 물동이 아래까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을 비유) 비추어 주신다면 돌아가신 혼백들은 응당히 결초보은할 것이며, 다시 살려준 큰 은혜는 태산도 가볍고 심해도 얕을 것입니다. 저의 몸은 오직 죽는 날이 곧 태어난 해입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님을 놀라게 하였으니 죽을죄를 짓고 즉을죄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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